피아노
감독 제인 캠피온 (1993 /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뉴질랜드)
출연 홀리 헌터,하비 키이텔,샘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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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라는, 여성 감독에 의한 이 작품을, 집에서 혼자 있다가 우연히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피아노를 진로로 생각했기에 피아노에 관해서는 굉장히 열성적이었다. 「피아노」라는 영화를 보게 된 계기도 단지 영화 제목이 「피아노」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 마음을 알아줄까. 그런 단순한 이유로 보게 된 영화지만, 이 영화는 내 마음 속에 굉장히 깊이 여운을 남겼다.



'나는 여섯살 이후로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난 내가 침묵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피아노 때문이다.' - 영화 초입부 에이다의 독백 中

 피아노와 소통하고 있는 에이다와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 수단인 피아노. 에이다의 독백과 에이다의 피아노 연주는 나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피아노에 대한 애착이라는 것은, 유별나고 남다르다. 나 역시 내가 치는 피아노의 음색 하나하나를 기억했고, 피아노 상태를 상당히 예민하게 느끼곤 했는데 이따금씩 연주에 깊이 몰입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피아노 소리를 나와 동일화 시키게 되곤 한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몰입했던 것은 에이다와 피아노의 관계에서 그런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차차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에로티시즘적 메시지 역시도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유혹적이고 매혹적인 영상의 시선처리는 전형적인 ‘관음’ 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훔쳐보는 듯’, 꺼림칙한 기분이면서도 결코 그만둘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영상을 봤던 것도 그에 연유할 것이다.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안 보여주는 것을 통한 에로틱한 감각이랄까.

  

 에이다의 남편은 그녀의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정사를 일부러 훔쳐 보기도 했다. 이것은 애증으로 번져 결국 그는 그녀를 파멸했다.

 
 후반부에서 에이다의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은 지금처럼 잔인안 영상이 난무하지 않던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미 주인공에게 상당히 몰입이 되어 있었던 탓에 이 장면을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을 붙잡고 안도했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슬픔이 밀려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저 이야기를 바라봤던 그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복선들도 눈에 보였고 그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느꼈던 모든 것이 감독이 연출하고 의도에 의해 집어넣었다는 것 역시 놀라웠다.

그렇지만 그 때에 비해 좀 더 영화를 읽어냈다는 것 뿐,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은 다르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다. 좋은 영화는 달리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소통하기 때문이다.

여성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소 놀랐긴 했지만, 그렇기에 정서적이고 아주 세밀한 표현 하나하나를 통해 에로티시즘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에게 소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미상관의 구조, 액자식 구성이면서도 액자가 아닌 구성. 연극을 통한 에이다의 운명 예시,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이 훌륭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영화 전반은 푸른 바탕에, 푸른 빛의 화면이 에이다의 얼굴을 더욱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는데 이러한 연출은 상당히 비극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준다. 영화 색체 이론에서는, 주로 파란색을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예로 영화색계에서 탕웨이가 파란 치파오를 입었던 것을 들 수 있겠다. 

  

  ‘피아노’라는 영화의 중심 매개물은, 하나의 오브제로서 작용하고 있다. 교수님께서 ‘피아노’라는 것이 에이다의 리비도라고 하셨는데, 나 역시 이 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영화 곳곳에서 피아노 치는 에이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앵글에 잡힌 그녀의 뒷모습은 그녀의 하얀 어깨선이나 목(푸른 빛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새하얗게 보이는)이 상당히 드러나 보이게 된다. ‘죠지’라는 인물이 에이다에게 강하게 끌리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데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도, 피아노 치는 에이다가 주는 묘연한 ‘성적 매력’으로 ‘죠지’의 행동이 필연성을 부여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본능적으로 작품 전체에 녹아든 에로티시즘을 느끼고 수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마지막 부분, 피아노를 물속에 빠뜨릴 때 그녀 역시 밧줄에 감겨 물에 빠지는 장면에서도 피아노와 그녀의 일체성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기독교적 상징’ 인 이 장면을 다시 보니, 신발을 벗어가면서까지 살아나기 위해 물 위로 솟아오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전의 에이다의 삶은 죽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는 확증을 발견했다. 비록 손가락은 잃었지만, 에이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택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후반부의 전개에서 나는 나다니엘 호손의「주홍글씨」를 떠올리게 되었다. 작품의 메시지나 기본구조가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불륜’을 다루고 있다는 점, 열정과 의지를 바탕으로 ‘여주인공’의 ‘삶’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품의 구조나 이야기 전개로 볼 때 피아노 역시 페미니즘적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두 작품이 여성의 삶을 논할 때의 ‘삶’과 ‘열정’을 본능적 욕구에 근거했다는 점은 한계라고 보지만.

그러나 두 이야기의 결론과 그에 따른 한계는 다소 상반된다. 「주홍글씨」의 헤스터 프린은 사회로 인해 도태되고 그 안에서 전혀 다른 방법의 새로운 삶을 산다면 『피아노』는 다소 비극적인 현실을 떠맡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택한 새 삶을 얻는다. 나는 그 이유를 두 주인공들의 ‘딸’로 인한다고 생각한다.

딸이라는 것은 어머니와 일부로서 어머니와 동일시되며,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홍글씨」에서의 딸 ‘펄’은 어머니 헤스터 프린의 성적욕망의 산물이며, 헤스터의 그러한 열정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로 헤스터 내면에 형벌을 가하지만, 『피아노』에서의 딸은 에이다의 열정의 하나이자 에이다와 동일시되는 또 하나의 존재임에도, 새 삶을 택하는 족쇄처럼 어머니의 성적욕망을 부정한다.

‘딸’의 존재는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운명을 비극적 상황으로 이끄는 구속의 주체였다. 자유를 얻은 듯하면서도 여전히 제압받는 인상은 이들의 존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각설하고, 에이다는 ‘자유의지’를 통해 행복을 얻었다. 에이다 스스로 택한 삶이었고, 스스로 책임질 삶이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따금 깊은 바다 속에 잠긴 그녀의 피아노와 함께 고요 속의 자장가를 듣는 그 편안함조차도, 그녀의 새 삶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2008년 7월 28일에 필자의 다른 블로그에 게재하였던 글을 수정, 다시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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