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9일

Posted 2014.05.21 16:29

 

 어떤 하루.

 근래 대부분의 날들을 그저 그렇게, 어떤 하루, 로 보내고 있다.

 매일 그렇지만, 어제는. 일찌감치 눈을 뜨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그루터기 교회를 갈까도 생각했다만은 어떤 얼굴로 그 자리에 있어야할 지 좀처럼 모르겠어서 그냥 눈을 감았다.

 일어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마라톤은 3시부터이지만 물품보관소 운영은 2시 10분. 가지 말까. 예배도 안 드린 주제에 마라톤이라니 하며 12시가 넘도록 미적대고 있었다. 간단히 끼니를 떼우고, 교통카드, 현금 조금, 체크카드, 그리고 겉옷 두벌을 챙기고 집을 나선 것이 한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일단 가보고 물품보관소에 맡길 수 있으면 맡기고 여의치 않으면 지하철 보관소를 찾고 그것도 안되면 돌아와야지, 하고서 집을 나섰다. 코리안타임은 어디에나 적용될테니, 하는 느긋한 마음과 동시에 - 밀려드는 자책감.

 탈의실에 들어가 껴입은 옷을 벗고 물품보관용 비닐팩에 옷을 쑤셔넣는데 밖에서 물품보관 마감하겠다는 독촉을 알려온다. 허겁지겁 옷이며 카드를 주워들고 겉옷을 쑤셔넣고, 마감하는 차 문 닫기 직전에 짐을 실려 보냈다. 물품 보관 스티커를 받고, 바람막이를 걸치고, 배번을 달고, 기록측정 칩을 달고나니 2시 45분. 참가자가 3만명이라니 광화문이 북새통이다. 진행하는 사회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전부 제멋대로. 나도 어딘가에 끼여들어서, 출발선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줄을 선 채 시작을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선두그룹 출발이었지만, 지각인데다 운영위원측에서 제대로 줄을 세운 것도 아니라, 10분 늦게 후발대+ B그룹 사람들이 엉킨 조로 출발했다. 스퍼트를 내고 싶어도 사람에 치여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에티켓도 숙지하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라 사람에 치여 앞으로 앞으로 걷는 지 뛰는 지도 모르고 내달리기만 했다. 애초에 기록 낼 생각은 없었고 완주가 목표긴 했지만 마음껏 내달리지 못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던지.

 한번도 쉬지 않고 5km 를 달린 건 처음인데다, 사람은 너무 많았고, 코스도 지리도 몰라 주변 돌아볼 여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 아쉽다. 8km 를 지나던 마포대교가 모두에게 최대의 난코스였다. 맞바람이 거세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바람에 밀릴 지경이었고, 그나마 근력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치고 나갔지만 이건 뭐,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하는 기분이랄까. 뛰느니 걷는 게 빠를 것 같은 바람에 속수무책 당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바람이 막아지지 않았다. 9km 이후로는 정신력 싸움이었지만-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완주라인을 통과하고도 '사람피하기'에만 몰두해서 정신이 없었다. 레이스를 마치고는 만신창이. 생애 첫 마라톤 대회였는데, 완주의 기쁨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라니 말 다했다. 우르르 몰려가 골인, 우르르 몰려가 짐 찾고, 우르르 몰려가 간식 받고 메달 받고.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에 겉옷을 껴입고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헤메다 집으로 돌아왔다.

 목표했던 1시간을 6분 넘겨 완주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면서 그제야 레이스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꽤 오버페이스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평속으로 달렸고 속도유지나 호흡도 잘 관리했다. 예상 했던 시간은 1시간 10분이었는데, 1시간 6분에 통과했고, 평균 5분 30- 6분 대의 페이스는 근래의 평균보다 훨씬 좋게 나온 편.

 오빠와 레이스 완주 기념으로 거하게 고기를 섭취하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사진 한 장 못 남겼는데도 신났다. 오빠까지 다음에는 자기도 한번 나가볼까, 하며 퇴근 빨리하면 같이 뛰어보든동, 하며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나는 그게 더 신났는지도.

 이러나 저러나- 달리기를 취미로 삼은 것이 내게는 참 큰 치료 효과를 가져다 준 것 같다. 토요일 심리검사 때도 그랬고, 마포대교의 거센 바람을 맞서면서도 그랬다.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싶어지고, 정말로 쉽게 포기한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쉬웠고, 또 근래에도 그랬다. 그렇게 쓰고 싶었던 졸업논문도 포기하는 것이 쉬웠다. 명예가 더럽혀지고 평판이 깎이고 이런 것들이 내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못하겠고,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고, 그래봤자 소용 없었고, 뭐든 그런 식이었으니까 말이다. 심리검사 때도 그랬다. 조금 어려워지면 아 못하겠다, 는 마음을 먹고선 할 수 있는 것이어도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모르겠어요' 는 상담 때에도 많이 했지만 내게 어떤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면 내뱉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라톤은 경우가 다르다. 일단 시작했으니 멈출 수는 없었고, 모두가 뛰고 있으니 나도 엉겹결에든 무심결에든 뛰게 되었다. 마포대교의 맞바람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한없이 늘어져 걷다가도 다시 페이스를 찾아 뛰었다.

 마포대교.

 몸이 기우뚱할 정도로 거센 바람에 밀리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헤쳐나갈 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 같았고, 늘 내가 말했던 것처럼 - 허허벌판에 몸 하나로 거센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괴로움을 마주해야했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은 생,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치 의욕을 잃게 만드는 거센 바람. 내 인생에서는 도무지 순풍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멈추었으면, 했다가, 그러다가, 언젠가는 바람도 그치겠지, 했다가, 그러다가,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며 버티기 시작했다. 주치의 선생님한테 말했던 것처럼 내게도 버티는 힘이 생겨났다. 심리검사 때도- 버티는 힘이 생겨났었다.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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