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4일

Posted 2014.05.16 16:27

 유치부 사역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사무실로 올라와 서류작업을 마쳤다. 토요일까지도 인사결정이 나질 않아 내심 조마조마 하고 있었는데, 점심무렵 부목사님이 넌지시 건너건너 소개드린 분 성함을 언급하셨다. 마침 당회가 있는 날이라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었다. 이번 주를 넘겨버렸다면 나는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다행한 일이다.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터라 적잖이 힘겨웠기 때문이다. 때마침 행사들이 잡혀 있어, 어찌어찌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망가듯 떠나는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러나- 다 떼어놓고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최선의 결정이라고, 생각해본다.

 신대원 특차 결과도 다음 주에 나오고, 사역도 한 주를 남겨놓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퇴근까지 대기 시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달만에 듣는 목소리다.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그러다 엄마는 또, 이제 교회일은 그만 하면 안되냐고 한다. 그러고보니 이곳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을 우리 가족 중에 아는 사람이 없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교회서 일하는 것보단 다른 일을 했으면 하나보다. 공무원시험 얘기는 벌써 몇 년째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 엄마, 이제와 내가 다른 것을 하려면 공부를 다시해야하는 걸. 그게 아닌 다음에는 말단 사무직이나, 그런 거 말곤 할 게 없는 걸. 엄마, 어찌됐거나 나는 이길을 갈라오. 나는 이 일 하는 게 좋아. 다른 이들 앞에서는 도무지 해 본 일 없는 말이 나온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취업을 알아봤던 내가, 이제 사역을 그만 두기로 결정된 내가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잘 모르겠다. 

 꼭 한번 하고 싶은 돈지랄이 있다. 프락셀, 치아-턱-광대 교정, 코필러, 라섹. 그리고 유럽일주, 성지순례, 인도, 이집트 사막. 꼭 하고 싶은 일은 소설을 하나 쓰는 것, 에세이집을 엮는 것. 배우고 싶은 것은 현대무용과 연기. 그리고 탱고. 나만의 레시피 100개 가지기.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외각, 정원이 딸린 창문 큰 이층 집. 2층에는 테라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부엌이 크고 넓은 곳, 거실은 환하고 높게 그리고 벽면은 책으로. 내게는 이런 식의 환상들이 많이 있다. 어떤 것은 실현 가능한 것들이고, 어떤 것은 정말 어디에도 쓸데 없어보이는 것들, 아니면 그걸 왜 하나 싶게 연관성 없는 것들, 또 어떤 것은 도무지 실현할 수 없는 것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러고 싶다는 건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에 메인 양 평일을 보낸다. 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망설이다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깊게 물든 낙엽이 길에 덮여있다. 가을이 깊었고, 바람에 겨울이 깃들었다. 매일마다 나는 새삼스럽게 놀란다. 가을이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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