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주 (Han Gong-Ju, 2014)

Posted 2014.05.12 17:07

 


한공주 (2014)

Han Gong-ju 
8.9
감독
이수진
출연
천우희, 정인선, 김소영, 이영란, 권범택
정보
드라마 | 한국 | 112 분 | 2014-04-17
글쓴이 평점  

 

 

"전 잘못한게 없는데요."

 

 힐난하듯 노려보는 어른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공주가 담담하게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 테이크 안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잘못한 게 없지만, '잘못한 게 없는 공주가 도망쳐야 한다'. 떳떳하게 버텨, 뒤집어 엎어, 싸워. 라는 말을 키보드로, 말로 쉽게 내뱉던 우리 방관자들은 이 장면이 낯뜨겁고, 불편하고, 답답하고, 수치스럽다.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학습한 현실을 통해 뼈져리게 안다. 시작부터 현실이라는 벽을 마주하고,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을 마주한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도리어 전학을 가야하고,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학교를 그만둬야 하고, 학교에서 자살한 학생의 부모가 죄송해야 하는 나라.

 잘못하면 댓가를 치르는 게 맞다고 배우며 자라왔지만, 권선징악은 아무래도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동화 속의 무고한 '공주'들은 언제나 악인의 계략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거머쥐었지만, 현실의 공주는 악한들의 손에 발각되지 않도록 멀리멀리, 끝도 없이 도망쳐야만 한다.

 

 영화는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한공주의 현재를 비추면서 순간순간, 사물에,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풍경에, 소리에 갑작스레 떠오르는 한공주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공주의 시선에 따라붙는 과거의 기억들. 자책들. 상실. 죄책. 슬픔. 괴로움. 절망. 분노.

책상에 엎드린 채 죽은 친구 화옥과 시선을 마주하는 장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공주의 현실이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딱딱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의 모양이나, 깜박거리는 형광등, 끈질기게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소리, 날카로운 지하철 소리. 첨벙, 물에 빠지는 소리. 그러다가 온 화면을 가득 메우는 '한공주!' 를 부르는 소리. 일상의 소리, 소리들에 기억이 따라 붙는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모양이나, 끊임없이 깜박거리는 형광등, 위협하듯 울려대는 핸드폰의 진동들은 한공주의 불안을 닮았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고장난 듯, 망가진 듯 위태롭고 불안한 움직임들이 일어난 사건들을 대변하듯, 일어날 사고를 예고하듯 긴장을 불어넣는다.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알 수는 없다. 영화는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풀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장면 장면마다 비춰지는 공주의 몸짓과 시선과 눈빛에서 그 심경을 엿보고, 퍼즐처럼 흩어진 기억의 파편을 조합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소리들에, 장면들에 오버랩되어 불쑥불쑥 떠오르는 공주의 기억에는 말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공주는, 누군가 자신을 '찍는' 것에 병적으로 날카로와지는 공주는. 무리지어 있는 남자들이 주변에 있기만 해도 두렵다. 걱정없이 웃는 또래 여자아이들의 얼굴이 아프다. 카메라의 시선은 한공주의 불안을 따라 흔들리고, 긴장하고, 달아난다.

 누구도 이 소녀의 불안을 들여다봐 주지 않는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

 

"엄마 나 있잖아..."

"진짜 궁금해? 말해줄까? 마흔 세명. 근데, 사람이 아니야. 고릴라였어"

 

 

 세상에 없는 존재이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숨을 죽인다. 소리가 나지 앉게 문을 닫고, 바퀴 소리가 나지 앉게 무거운 짐가방을 들어 움직이는 공주의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안쓰럽다.

 

 

 "왜요? ...아저씨, 근데요.. 사과를 받는데, 왜 제가 도망쳐야 해요?"

 

  아마 우리는, 공주를 전학시키면서 선생님이 말했던 것 이상의 대답을 공주에게 해주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도, 네가 잘못한 거 아니라는 거 알아. 네 잘못 아니야. 근데.. 니가 잘못한 게 아닌데, .. 그렇게 되는게 있어.."

 

 그렇게 되는 것, 그건 이 사회의 무수한 것들이 뒤엉킨 실타래 같은 것이다. 피해자의 신변을 보호해주지 않는 구조, 성폭행 피해자는 '행실이 좋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피해자를 탓하는 사회의 분위기, 왕따 당한 아이에게 그럴만했으니까 당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 곧 힘이고 정의가 되는 현실, 피해자의 편에 섰다가 도리어 해를 입기에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현명한 현실. 한 사람이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벽이다.  

 누구도 공주를 지켜주지 않고, 누구도 공주를 돌보아주지 않고, 누구도 공주에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수영은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물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공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25m. 딱 그만큼만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봤자 벽이야."

 

 

 밀양 여중생 집단 윤간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실화보다 오히려 덜 잔인했을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웹툰 '콘스탄쯔 이야기'나, 현재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청소년 영화', 집단따돌림을 다룬 우리나라 소설 원작 영화 '우아한 거짓말', 외국 영화 '애프터 루시아', 일본 작가의 소설 '풍장의 교실'.. 모두 문학의 옷을 입고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무력감은 어찌된 일인가.

 

 나 역시도 그저, 억지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내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비겁한 사람들의 태도를 걸러내지 않아서 입은 쓸지언정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호소하기 위해 불필요한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은 것도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편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수 없다. 차마 미안하다 말할 수도 없다. 수많은 한공주를 '내 탓이 아니오' 하며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희였을 수도 있고, 선생님 어머니였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었을 수도 있다. 흉기로서의 성기를 가진 불량배 남자애들만 나쁜 새끼가 아니고, 자기 새끼 빨간 줄 그인다고 전전긍긍하는 그 학부모들만 쳐죽일 것들이 아니다.

 무거운 인생 짐을 질질 끌고 가는 아이가 그 짐을 풀어놓고 쉴 곳조차 없게 한 이 사회에게, 바로 우리에게 공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ciao, bella, ciao. 안녕, 어여쁜 사람아 안녕.

아카펠라의 멜로디가 한공주의 무덤이 된 한강에 추도곡처럼 울려 퍼진다.

 

 

 

 

 

 

나는 죽을지도 모르오. 만약 내가 의용군으로서 죽거들랑 그대는 나를 묻어주어야 하오.

저쪽 산에 묻어주오. 아름다운 꽃 그늘에.

안녕,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히.

그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말할 것이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

그것은 의용군의 꽃.

자유를 위해 죽어간 의용군의 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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