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0일 일기

Posted 2014.02.18 13:46

 23년 만에 다시 공휴일이 되었건만 책상에 놓인 달력에는 검은색 숫자 9 옆에 '한글날'이 작게 쓰여있다. 여기저기 스케쥴이 적힌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다 [2013년 10월 9일, 나래와 서울숲에서 가을소풍.] 하고, 마음에 빨간 도장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본다.

 늦여름의 기운을 담뿍 담은 햇살과 가을 바람, 사람들의 들뜬 기분이 서울숲을 들썩였다. 어딜가나 사람들로 넘쳐나 편의점판 김밥으로 마음에 점 하나 찍고도 소풍 기분 제대로 난다 했다. 학창시절과는 다른 의미로 소풍은 즐거웠다. 가벼운 마음과, 걸을 수 있는 힘, 그리고 나눌 수록 풍성해지는 삶들이- 눈에 담는 풍경에 색채를 더한다. 살아있음과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짐을 나누어진다. 생명으로 넘쳐나는 시간. 해질무렵 노란 빛이 내려앉는 정원을 발견했을 때는 숨겨진 보물을 찾은 것마냥 우리는 기뻐했다. 오래된 벽과 벽을 타고 자란 담쟁이와 노을이 자아내는 풍경이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쓸쓸한 색을 입고도 그것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곳에 사람이 많았던가, 아니었던가. 서울숲 어디에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조금도 소란하다 느끼지 않았다. 편안하고 생기로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담장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 여유와 즐거움과 행복으로 달뜬 마음 같은 것들로 마음이 풍요로웠다. 곁에 있는 이와의 대화에 윤기가 흘렀다. 참, 오랫만에 누리는 편안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민성을 잠시 언급한 후부터 너무도 세심하게 나를 배려해준 나래 덕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온갖 소리와 움직임과 색채와 냄새가 뒤섞여 있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근래 들어 나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이 얼마나 놀랄지. 하루를 정리하다 오늘을, 그저 흘려보낼 수 없어 무작정 적어 남기고 있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살아가는 나날들과, 꿈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존재임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헤어질 무렵, 서울숲을 거닐다 오늘 하루에 제목을 붙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가을소풍'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엔 오늘 나눈 이야기의 흐름들이 아쉬웠던 탓이다. 헤어질 무렵 - 나래는 좋은 책 한권을 읽은 것 같은 하루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두고 참 좋은 제목이라고 답했다. 이야기를 담은 책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발점에서 인물과 배경이 한정지어지고 공간이 형성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건이 전개되고 발전하고 서서히 종점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의 오늘 하루는 좋은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늦은 아침, 주인 모를 번호로 갑작스럽게 날아든 소풍 제안이 내 일상에 날아든 '특별한 사건', 시발점이었고 그렇게 우리의 가을 소풍이 전개되었고 아름다운 배경과 인물, 그리고 풍성한 이야기들로 빽빽하게 채워져나갔고,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 나눈 이야기들은 기억 속에 흩어진다할지라도. 우리의 인상에 남은 2013년 10월 9일 한글날, 서울숲에서의 가을소풍은- 당일치기 여행과 함께한 에세이 한 권처럼 우리의 마음에 의미있는 흔적이 되어줄 것이다.

 이 하루가 감사하다.

 나의 문장을 고요히, 그러나 뭉근히 지켜봐주는 독자들이 도처에 있음을 또 한번 실감하고 그것이 눈물겹게 감사했다. 이 독자들은 소리없이 다정한, 그리고 든든하다. 참- 아름다운 사람들. 눈물겨운 세상, 눈물나게 할 사람들 같으니.

 부디 나의 이 사람들에게 행복이 가득하기를

 하나님, 모두가 행복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투병기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10월 11일 일기  (0) 2014.05.09
2013년 10월 10일 일기 -2  (0) 2014.05.08
2013년 10월 10일 일기  (0) 2014.02.18
2013년 10월 8일  (0) 2014.02.17
2013년 10월 6일  (0) 2014.02.16
2013년 10월 4일 일기  (0) 2014.02.14
Write your message and submit
« PREV : 1 : ···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 : 81 : NEXT »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