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는 남자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 / 독일,핀란드,프랑스)
출연 마르쿠 펠톨라,카티 오우티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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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둣가에서 발견되는 남자. 보통 물에 빠지는 것은 전형적인 세례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기독교에서 세례는 이전 삶은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 작품에서 사용될 때에는 세례의 의미에서 종교적인 의미가 배제된다. 물론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이러한 상징이 명료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만 남자가 심정지로 사망판정을 받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나, 병원에서 나온 후 의식을 잃은 채 연고 없는 지역의 부둣가에서 발견되는 장면으로 미루어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과거가 없다. 사라진 것은 아니나, 기억에서 지워졌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규정할 수는 없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 채 다른 삶이 주어진 것이다.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인간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묻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누구이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 가치는 무엇인가? 실존주의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존재의 의미는 인간이 자아를 갖고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시점까지 이룩한 생의 총계일 뿐 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무는 인간이 언제라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 자유의 원천이 된다. 다시 말해, 생은 인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규정된다. 실존(인간의 존재)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다. 자아는 오직 자신의 자각적 선택과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이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자신의 존재에 본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실존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과 자각을 가지며 또한 행동의 자유를 갖는 동시에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실존은 자각, 자유, 선택,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사조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구분 지어 질 수 있다. 앞서의 것과 같은 주장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속하는 사르트르의 경향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등에 이른다. 특히 야스퍼스에서,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와 관계되는 것’인데 한편으로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 본질을 결정하는 신이 없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실존이 선행하고 이 실존에는 인간 스스로에게 모든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부여되게 된다. 사상가들마다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관심은 존재의 문제인 본체론에 있으며, 그 출발점은 인간의식과 심리과정에서 비롯된다. 실존주의자들은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이들의 사고는, 주체적 자각과 결단, 그리고 실천을 강조하는 행동의 철학이다.

영화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보다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남자에게는 과거가 없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다. 인간존재라는 것이 그 시점까지 이룩한 생의 총계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따르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다. 자신을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외부적 지시물이 그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간다. ‘앞만 보고 가는 세상 뒤돌아 봐서 뭐하나’. 어떻게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남자는 그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이러한 남자의 태도는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가치를 가진 일인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질문이지만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어둡지 않다.




남자는 빈민가에 거처하면서, 사람들과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나누며 함께 일상의 소박함을 꾸려 나간다.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부조리와 거친 경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변함 없으나 결코 아둥바둥 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타인과의 관계성은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말한 바의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은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것이면서 또한 초월자와도 관계 되는 것이다. 영화 내에서는 초월자,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뚜렷하게 명시하는 바는 없다. 다만 영화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복음성가의 가사를 통해서 그를 생각하게 하고, 각박한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그를 보게 한다. 보다 큰 경륜 안에 존재하는 실존이라는 것 말이다. ‘원래는 비기독교 신자를 개종시키는 날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합창단에서 인간의 괴로운 심정을 노래하겠답니다. 하지만 가사를 들어보니 주님 안 계신 삶은 무가치하다는 내용도 담겼더군요.’ 구세군의 포교활동이라고 보기에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말하는 바와 너무나 일치한다. 

실존의 위기는 계속해서 남자에게 위협을 가한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직장을 얻을 수도 없고, 이름이 없기 때문에 통장을 만들 수도 없고, 서명조차 할 수 없다. 우리를 말해주고 규정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를 짚으라면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시인 김춘수의 ‘꽃’은 실존주의의 고뇌를 여실히 드러내어 주는데, 여기에서 그가 사용한 핵심 단어가 바로 ‘이름’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으로 화한 의미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존을, 그 실존의 본질을 말한다. ‘이름’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단순히 우리가 어떻게 불리우는가 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이름은 존재를 드러낸다. 내가 어디에서부터 왔고, 내가 누구인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름이며, 우리를 규정하는 외부적 지시물들을 대체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존주의가 지적하는 음울한 질문은 남는다. 어째서 인간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 수용되지 못하는가?

거의 표정 없는 얼굴에, 감정이 배제된 듯한 어조로 일관하는 배우들은 염세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간간히 등장하는 블랙 유머는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고 블랙 유머 특유의 ‘실존에 관한 우울한’ 웃음을 자아낸다. 사람을 웃기면서도 인간 존재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느끼게 하는 블랙유머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이 드러난다. 인간존재의 의의를 추구하고, 삶의 비참하고 부조리한 일면들을 보여주는 이러한 것들 속에는 실존주의적인 고뇌가 나타나고 있다. 일상적인 상황,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들에도 관객들은 웃는다.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던 잠재된 의식과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던 불안감들이 들썩인다. 그럼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블랙유머는 우울한 데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이 아지랑이처럼 움튼다.

 위기의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수용되고, 자아는 자기와의 관계를,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쌓아 간다. ‘이름’을 찾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졌던 곳으로 ‘돌아’간다. 리차드 니버의 ‘책임적 자아(The responsible self)’에서 니버는 책임윤리를 말한다. ‘책임적 자아’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Ich und du)’를 차용하였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 개념은 실존주의는 물론 책임 윤리를 말하는 학자들에게도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공통된 견해는 이것이다. 자아라는 주체는 타자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또 이 자아는 ‘너’에게만이 아니라 ‘너희들’에게도 응답하는 자아이다. 그리고 그 ‘너’와 ‘너희들’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또 다른 ‘너’와 ‘너희들’에 응답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자아(ich)는 비자아(nicht ich)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라는 설명이다. 니버가 말하는 책임적 자아는 실존주의를 비롯하여 그 아류로 형성된 허무주의, 회의주의에 적절한 답을 내려준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로 실존을 정립해나가야 하는 인간 존재는 ‘시도만 하다가 끝나고 마는’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고,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미약하다. 왜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 이에 대한 답을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말해줄 수 없다.

 절대자의 거대한 경륜 안에서, 자아들은 서로 간에 관계를 형성한다. 이 관계라는 것은 일차원적이지 않다. 우리는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을 예상하며 응답한다. 이것이 실존에 주어진 책임이고, 실존이 의미할 수 있는 토대이다. 말은 어렵지만 결코 거창하지 않다. 만족하는 것이다. 자그마한 땅에 심은 감자를 수확해서 몇 알은 후일을 위해 씨감자로 남겨두고, 몇 알은 추운 계절을 보내기 위해 저장해두고, 몇 알은 그날의 식사로 사용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기쁨 말이다. ‘인간의 삶은 이래야만 한다’ 말하는 그 어떤 말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답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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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메

    | 2011.09.16 23:24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씨네뮤직에서 보고 검색해서 들어와 좋은 글 봅니다.
    영화 하나에 수많은 철학적 메세지가 담겨있네요(철학적이란 말이 뭔지도 모르지만요)

  2. 문현우

    | 2011.12.18 23:3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영화 감상을 막하고, 제가 혹여 놓친부분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걸까라는 생각에 찾아오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지라,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하는 영화네요.
    글을 읽고 영화를 실존주의라는 것에 초첨을 맞춰생각해보니, 그저 액션영화보듯 그냥 지나쳐버렸던 부분들이 또 다른 의미가 되어 상기되는군요.
    좋은 글 잘보고갑니다. 덕분에 조금 더 삶에 대해서 알아가게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의 가치로 정립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겠군요.
    모쪼록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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