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8 / 독일,미국)
출연 케이트 윈슬렛,데이빗 크로스,랄프 파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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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제목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로맨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를 보다보면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예루살렘의 재판과 뉘렌 베르크에서 있었던 나치 전범에 대한 재판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글을 모르는 여자다. 그녀는 돈을 받지 많이 받지 못하는 대신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없어도 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그녀에게 SS [나치 독일의 친위대(Schutzstaffel) 소속 무장 전투집단]에 들어오면 경비원 자리를 준다는 제안이 들어온다. 망설일 것 없이 그녀는 나치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들어간다.
종전 후 그녀는 나치 전범을 대상으로 한 재판에 회부되는데, 거기에서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식견있는 피고들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한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몰랐노라,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다 등 나치 전범에 대한 판결에서 그들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는 메뉴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 방편의 하나가 '명령에 따랐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강압적 상황에 내몰렸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 슈미츠는 이것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했고 그들의 이념과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는 상관 없었다. 그녀에게 유대인은 감시하고 관리해야할 '죄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우슈비츠로 보낼 사람들을 골라내라는 지시에 따랐다. 유대인들을 가둬둔 교회 본당에 불이 났어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반인륜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이 행동은 아이히만의 경우와 같은 무지에 기반한다. 또한, 지나간 일을 재판하는 잣대의 오류이기도 하다. 그 당시 독일 전역, 유럽 전역에 한나 슈미츠가 관리했던 것과 같은 수용소가 편재해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 끝에는 죽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같이 폭력 앞에, 자신의 이익 앞에 침묵했다. '본디오 빌라도'처럼. 그러나 유죄라고 선고 받는 것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객관적으로 파악 가능한 이들 뿐이었다.
한나 슈미츠에게는 명백하게 살인을 방조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라서거나 인류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에 따라 살았다. 명백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책임이었고, 그녀의 양심이었다. 더 큰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가 판단하기로는. 유대인도 아니고, 나치 당원도 아닌, 그렇다고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닌, 그 시대 이 후의 우리는 그 때의 사회를 모른다. 묵인된 채 자행되고 있었던 사회 원리는 지금에 와서는 범죄이지만 그 때는 그것이 바른 일이었던 사람도 있다.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처럼, 한나 슈미츠는 그저 통용되는 사회규칙이 변했을 뿐이라는 인식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이 이 장면을 접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나조차도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이 전에 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들을 봤을 때와 같이 '저러한 극악무도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한 전범들'에 대해서 분노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에서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범죄로 여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익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류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고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말이다. 그런데, 사실 전쟁이 범죄로 정의된 것은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 제 1차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황제 빌헬름 2세에게 책임을 물어 소출을 결정했다. 네덜란드가 신병인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덧붙여 이 시기를 다룬 영화를 보면 나치를 악으로만 상정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굳게 하는 것도 있다.)
제 2차대전에 대해서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간에 이 부분을 마주한 관객들은 갑갑증을 느꼈을 것같다. 물론, 한나 슈미츠가 문맹이라서 책임을 떠맡고 형량이 추가되었다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나치 전범에 대한 판단의 모순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안타까울 것이다. 그녀의 이 전 모습과 몇몇가지 진실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치 전범이라는 것과, 또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경멸스러운 심정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곧 남자 주인공인 마이클의 번뇌이기도 하다. 법을 전공하는 독일인으로서, 그리고 과거의 연인으로서 그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 역겨운 법정의 상황, 살인에 동조한 것이 분명함에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옛 연인. 무지로 불공평하게 가중된 형량을 감당하게된 한 사람. 정의는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범죄자이자, 또한 자신의 옛 연인이기도 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은가. 그가 겪는 이 딜레마는 관객의 그것이기도 하고, 종전 후 사람들 안에 남아있는 경악과 분노, 연민이 뒤섞인 그것이기도 하다. 마이클의 분노는 살인과 그에 대해 마땅히 인간이 가져야할 가책이 없는 데에 대한 실망과 경악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타인에게는 잔혹함으로 비춰졌던 행동들이 단순히 문맹이었기 때문이라는 진실과 문맹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수치가 되었기 때문에 밝힐 수 없어서 형량이 더해졌다는, 개인에 대한 연민에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던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데드맨 워킹 등 범죄자와의 개인적 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몇몇 있는데 거기에서도 항상 이러한 딜레마가 있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한 생명, 그리고 개인이 가지는 독특함과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처우가 어떠해야할 것인가와 같은 것이 그와 같다.
한 인간으로서의 한나 슈미츠와 범죄자로서의 한나 슈미츠. 마이클은 양쪽을 다 취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슈미츠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나로서는, 처음부터 그녀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두려움은 세상이었다기 보다는, 가장 가까웠던 - 자신을 인간 그 자체로 대했던 한 사람 안에서 범죄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상을 발견했을 때의 좌절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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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lerkje

    | 2011.08.06 21:4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 독특한 것 같습니다. 정말 이 영화를 극악 무도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범죄자의 구도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한 것 같네요.

  2. 이데.

    | 2011.08.07 16:11 신고 | PERMALINK | EDIT |

    ^^감사합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영화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리더의 원작인 소설에는 제가 이야기한 부분들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하니, 틈나실 때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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