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 비행 1989, 우디 앨런

Posted 2011.08.05 18:00

범죄와 비행
감독 우디 앨런 (1989 / 미국)
출연 캐롤라인 아론,앨런 앨다,우디 앨런,클레어 블룸,미아 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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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 관한 질문 중에서 유독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 문제이다. 지고하고 선하며 거룩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수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바로 이 악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시도해왔고, 다른 난해한 문제들과 함께 이 문제는 여전히 명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악의 문제와 함께 동반되는 것은 의 문제이다. 이에 수반되는 질문이 바로 왜 사람들은 나쁜 행동을 하는가?’이고 나아가 창조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로까지 발전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다원화된 사회에 제기되는 이 물음은, 어떤 문제들에 대한 도덕판단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현 시대는 상황에 의존한다. 절대적인 윤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황이 사람들을 몰고 간다고도 한다. 도덕이라는 전통적 틀과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대답의 추구라는 이중의 요구 사이에 놓인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반 차이 없이 살고 있는 작금의 시대상황에서 윤리에 대한 포스트모던시대의 지적은 항변할 길이 없어 보인다. 범죄와 비행을 구분 짓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반응은 과연 타당한 근거를 가진 것인가? 우리는 타당한 도덕판단에 이르고 있는가? 그마저도 우리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주변에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들에 반응하기 마련이지만, 솔직히 말해 이러한 도덕적 판단들은 종종 우리의 짧은 지식과 편견, 그리고 심지어 자기 이익에서 나온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어쩌다에 불과하다. 영화는 범죄를 유다라는 인물에, 비행을 클리프에 대비하는 듯하지만, 대칭구조라고 하기에는 그 구도가 다소 약해 보이는 것은 여기에 기인할 지도 모르겠다.

 윤리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유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흥미롭게 생각했던 점은 유다가 성서의 유다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성서의 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은 30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 팔았고, 죄책감만 가지다 진정한 회개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자살했다. 영화의 유다 역시 자기 스스로를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현실에의 이익을 위해 죄를 저지른 후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는 두 가지 체계가 대립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과 도덕성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 명료하게 하자면 대립하고 있는 체계는 도덕적 실재론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도덕적 실재론은 기독교 윤리학에 영향을 준 것인데, 도덕적 다원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덕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한 도덕적 질서, 가령 하나님의 명령과 같은 질서가 실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도덕법을 각인해두셨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특정한 도덕적 정황이나 판단에서 실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은 선과 악을 알게 함으로써 삶을 안내해 준다고 말한다. 유다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곧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 전통에서 자라온 그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신다는 것이 믿음이었고, 이 때 도덕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철학자 레비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내용들은 바로 이 도덕적 실재론에 대해 현 서구문화가 거부하고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윤리가 내세우는 입장과 일치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이 도덕의 기초라는 생각을 비판한다. 이러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도덕 회의론, 허무주의(니힐리즘), 주관주의와도 일면 상통한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의 의지나 실존적 의미에 중점을 두며, 자신의 윤리는 자신이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본능 혹은 정신적 동기로부터 유발된 의지에 따라 윤리적 행동이 결정된다고 본다. 유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고모의 대화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그의 고모가 말하는 내용이 바로 이러한 입장이다.

 두 입장의 대립은 유다의 내적 갈등과 일치한다. 유대 랍비 벤과 유대인 철학자 레비 교수의 인터뷰도 역시 각각 양쪽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극도로 번진 유다가 다르게 표현하면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한 유다가-유년 시절에 살던 집을 방문하여 옛 기억을 떠올리는데, 거기서 그는 한 개인이 가지는 도덕과 죄의 문제에 대하여 대립각을 이루는 가족들의 대화를 목격한다. 이것은 마치 유다의 내적 갈등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눈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다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묻는다. ‘그렇다면 살인을 한 사람은요?’ 대립하고 있는 두 가치는 그에게 답한다. 한 편에서는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든 벌을 받는다하고 다른 편에서는 죄의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잡히면 벌을 받겠지, 하지만 잡히지도 않았고 살인을 하고도 윤리적으로 스스로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로워 질 수 있다라고.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후자에 더 힘이 실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도덕이라는 전통적 틀이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들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한 사람이 도덕 관념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나님이 잘 하는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을 주시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면 어째서 남을 속이고 죽이고, 위반 행위를 한 악한 이들이 도리어 성공을 거머쥐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인가? 하나님이 공의라면 이러한 현실 상황은 너무나 불공평한 것 아닌가?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다른 어떤 형태의 것이든)이 정의라는 말은 현실에서는 부정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심은 대로 거둔다.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라는 주장은 씨알도 안 먹힐 위협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되레 에이, 선수끼리 왜 이래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도덕이라면서도, 인간은 도무지 도덕적인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행위에서도 하지 말라고 제어된 규범들을 벗어나는 일(비행)을 저지른다. 이를테면, 꼬맹이들이 행사용 3단 케이크에 손가락을 찍어 생크림을 빨아먹는 행동 같은 것 말이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구와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낸 규칙(‘이 정도까진 괜찮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사람 아니겠냐는, 인간에 대한 지극히 회의적인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희망적일 수 있는 것은, ‘책임이라는 명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레비 교수의 독백이 있다. 그가 말하는 선택을 통한 자기규정이나, ‘노력만 하다 마는 것 같다는 무기력함도, 의미라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 자기 자신의 능력에서 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허무주의, 주관주의가 이야기하는 관점과 일치한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일면 타당하다.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상황들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 상황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에 응답한다. 이 때에 우리 자아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왜 책임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하지도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도 않는다면 삶은 허망하고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말하는 허무주의의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 자체로는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 끝은 결국 자살일 수 밖에 없다(철학자 레비 교수의 마지막 선택). 세계의 상호의존성이 높아질수록, 우리에게는 생태계의 위기와 지구촌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갈등에 있어서 책임적이어야 할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 두려움과 자기이익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삶의 통전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생명존중이라는 창조주의 요구에 부합하는 관점에서도 책임적이어야 할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온전한 감사의 응답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무수한 상황들 가운데 서 있고,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선택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레비 교수의 말에 의하면), 그 선택이라는 것은 사실 상황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해석과 해석한 내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의 결단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응답하는 자아이고, 다시 말해 책임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에 대한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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