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8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판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그를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법정에 세운 것인데, 그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재판 동안 밝혀진 사실과 한나 아렌트가 개인적으로 조사해내어 알게 된 사실들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극악무도의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수뇌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는 권한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이주 및 이송'이었다. 재판에 회부된 아이히만이 범죄의 혐의를 갖게된 '대량학살의 주도'라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가 한 일은 유대인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는 것 뿐이었다. 400~500만으로 추산된다는 아우슈비츠의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을 그 이송을 담당했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에 대한 평가나 알려진 사실들은 제각각이다.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일관되지 않고 있다. 그의 지위나 권한, 임무에 관한 것이 특히 그렇다.
 아렌트의 아이히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신랄하다. 허풍과 허세로 점철된 사람(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지식이 짧고 사고의 깊이가 깊지 않은, 때문에 정책적인 일을 하기에는 불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어느 정도 지위 이상으로는 진급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사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잘 수행해낼 수 있는 일만을 해냈던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아렌트가 그의 무능력에 대해 지적한 것은 주목할만 하다. 아렌트는 그의 무능력을 세 가지로 말했다. 말의 무능력, 사고의 무능력,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의 무능력. 그가 사용하는 상투어는 끔찍할 정도로 그에게 체화되어 있어서 그 외에는 다른 말로 그에게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신이 행하는 일의 결과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듣는 사람의 이해가 어디에 있는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악이 얼마나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리할 수 있는가를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 뿌리깊게 박힌 나치의 언어는 현실감각-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을 마비시켰다. 그는 나치의 어떤 목적이나 대의도 알지 못하는, 스스로의 이상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었다. 맡은 일에 대한 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는 그의 진술은 이를 시사한다.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은 어쩌면 그 자체로는 진실인 것이다. 그는 대량학살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며 즐거워하는 살인마도 아니었고, '유대인'을 죽여야만 한다는 의도와 목적 하에 효율성을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었기 때문에 성실하게, 더 나은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라는 것이 결코 악에 참가한 일(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아이히만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내가 맡은 일을 불성실하게 처리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경악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알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오?"
 아이히만은 답한다.
 "만일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렌트가 지적한대로 그는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살인을 지시하거나 자신이 살해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결정적인 역할에서 자기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노라고 말이다. 재판부의 판결은 이 부분에 있어 매우 적확하다. '멀리 떨어져 있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근대에 발현될 수 있는 최대의 악을 목격했다. 그것은 인간 존엄의 상실이다. 그것은 피해자였던 유대인에게나 가해자였던 나치들에게나 똑같은 분량으로 찾아왔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상징적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량 학살과 인간 생체실험이 자행된 일,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한 이데올로기. 나치 전범을 재판대에 세운다 해도 진실로 판결받아 마땅한, 악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렌트조차도 이 법정이 내세우고 있는 것, 정의를 실행하는 것은 국제 재판소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심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그들의 우두머리 -실질적 책임을 떠맡아 마땅해보이는- 는 자살했다. 뉘렌베르크의 재판에서 꽤 많은 수뇌부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징역 혹은 교수형에 처해졌던 많은 사람들이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하거나, 고용인으로서의 일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나치가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문제는, 유대인의 대량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대인 지도자를 비롯하여 유대인 자체 내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혐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홀로코스트가 있었던 때, 그 자리에 있었건 그것이 아니건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고 있었다. 수용되어 있는 유대인들은 그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지 않고 자유로이 행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전쟁은, 그리고 민족 말살을 위한 대량 학살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다.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문화를 죽임으로써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점이나, 일명 마루타로 불리는 인체실험이 행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제 3세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어린 소년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러 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한 부족국가가 멸절할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 단지 몇 백만이라는 숫자 때문에 나치가 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히만이 무죄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히만을 비롯하여 나치의 일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준 사람들의 죄는 가볍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범죄에서 멀고 가깝고가 죄의 경중을 가려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는 정도랄까. 아렌트는 보고서에서 몇 번이나 이 재판을 일종의 '쇼'라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재판 자체가 본보기로써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뉘렌베르크의 나치 전범 재판은 승전한 연합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국가의 이름을 단 재판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그래서 검사측이 재판부에 제기한 소송의 내용과 소송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내용들 간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수뇌부도 아닌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납치까지 해서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이 재판 자체가 가질 수 있는 함의가 어떻든 재판 자체의 타당성은 지지해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글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듯 보이게 된다. 이스라엘 측에서 아렌트를 비난한 것도 이해가 갈 수 밖에 없다. 나 역시도, 그런 씁쓸함을 읽는다. 다소 비약해서 말하자면 상징성을 위해 희생된 제물로 아이히만을 비유하고 싶을 정도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중 마지막 문장에 딱 한번 등장한다. 그렇지만 보고서 전체의 맥락에 따라,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함축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p. 349)' 상투어 속에 감춰진 진실/현실과, 자신의 일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아렌트가 지적하는 악이라는 것은 벌어진 어떠한 사건이나 사고들보다 그 뒤에 감추어진 이러한 인간 행동의 조건들-인간 정신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뜨거웠다. 그러나 이 논의는 다소 오해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평범성이라는 banality는 진부성이나 일상성으로 읽혀지기 쉽다. 평범하고 익숙할 정도로 많이 접해서 진부해졌다는 의미라거나 혹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일상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서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보고서 전체를 통해 말하고 있는 평범성이라는 것은 잔혹상이 일반화 된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악이란 평범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의미가 더 옳다.(여기까지 p. 15 역자서문 참조) 그리고 그것은 나치들이 일상언어를 그들이 사용하는 상투어로 만든 것이 인간 정신에 있어서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작용을 낳았다는 데 이른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무능력을 지적한 부분에서는 더욱 명확해진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of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p.106)' 악의 평범성에 대한 얘기는 이정도로 각설해도 좋겠다. 이미 이 논의가 충분히 있어왔기 때문이다.

 누구를, 무엇을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인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여겨진다. 도덕적인 가치 판단에 의해서 그렇다. 전쟁이라던가 독재 등의 체제 하에서는 불법이 법으로 뒤집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하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정의란 무엇인가?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이 휴머니즘을 주창한다. 알려진 대표적인 예들은 다음과 같다.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더 리더(일부)'.
 인간 존중, 존엄성, 삶의 가치, 인간의 조건, 생명의 가치, 타인에 대한 이해 등을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다. 이러한 영화 속에서, 나치는 악으로 상정된다. 생명 하나의 무게를 더욱 높이고, 그것에 반하는 행위를 반인륜적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모르는' 부도덕이라는 각인을 새겨 넣는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믿는 바와 같이, 과연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요소들이 선하고 숭고한 가치를 지녔다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을 것인지.

 씁쓸하다. 우리는 이 적을 결코 심판대에 세울 수 없다.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실체를 목격하면 할 수록 우리는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분노하고 경멸한다. 몸서리쳐지는 인간의 잔혹성을 발견한다. 인간 안에 내제한 악의 실체. 우리 조차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라는 막연한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무엇을 심판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때에 무력감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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