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배심원의 판정을 기다리고 배심원들은 그를 한번 흘깃 눈을 맞추고퇴장한다. 소년의 표정은 그 속을 짐작하기 힘들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듯한 눈망울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정황과 알리바이, 증언에 기초한 판단만이 남아있다. 판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한 해 중 가장 더운 날, 에어컨도 없는 방 안에서 12명의 남자들이 모여 살인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들의 판결에는 한 소년의 인생이 달려 있다. ‘한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피고의 유죄를 의심할 근거가 있다면배심원들은 무죄판결을, 그렇지 않다면 피고에게는 유죄판결을 내려야 한다. 어떤 결정이든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 배심원들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때문에 배심원들의 책임 역시 절대적이다. 방 안은 무덥고, 사건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근거가 과연 있을까?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장소의 변화가 거의 없이 90분 가량 진행되는 영화는, 장소의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다기보다 오히려 긴장감이 넘쳐 조바심이 날 정도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은 지금 모두 잔뜩 찡그려진(angry)’ 상태에 있다. 보이지 않는 갈등과 무더위와 밀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선 책임(물론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을).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압박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잔뜩 찡그리게 한다.

 소년의 유죄 판결이 명백해 보이는 이 사건에서, 12명의 배심원 중 단 한 명이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다. 배심원의 판결은 12명의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angry한 상태에서 금방 벗어날 것을 기대했던 나머지 배심원들의 기분은 더욱 찡그려진다. 촉발된 갈등은 짙어지고,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남자는 계속해서 모든 증언과 변호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무더위와 제한된 공간과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자신들을 둘러싼 제약 때문에 짜증이 날 대로 나 있는 나머지 11명의 배심원들도 차츰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보았던 EBS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시리즈가 생각났다. 그 다큐멘터리는 크게 2부로 나뉘어 한쪽에서는 상황윤리를, 한쪽에서는 착각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2, 착각(Illusion)을 다루고 있는 점이 나에게는 유사하게 다가왔다. 착각(Illusion)이라는 단어는 심리학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대상이 특수한 조건 하에서 통상의 경우와는 달리 지각되는 현상’. 흔히는 감각기관의 착각, 인지의 착각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넓은 의미에서 착각이라는 것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포함한다. 개개인이 가진 인식의 틀이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어떤 사실이 다르게 지각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역시 같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착각이라는 개념 또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강력하게 유죄를 주장하던 남자가 처음 무죄를 주장한 남자에게 화가 나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목에서 급격한 반전을 맞는다. 화가 난 상태의 사람은 어떤 말을 내뱉을 지 모른다. 증언을 지지하던 결정적인 이유가 이 대목에서 힘을 잃었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남자가 외치자 일순 침묵이 모두를 휘감는다. 결정타는 무죄를 주장하던 남자의 한마디 설마 정말 죽이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였다. 그제서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증언과 정황에 대한 판단을 절대화 시켰음을 인정하게 된다.

 갈등이 극에 달한 것 같지만, 상황은 의외로 처음 무죄를 제기한 남자에게 우세하게 흘러간다. 이제 유죄와 무죄는 6:6 이고, 그야 말로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모두들 침묵하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면서 무거운 침묵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진짜 문제가 서서히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실, 배심원들의 임무는 유죄를 의심할만한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무죄 판결을 내리고, 유죄가 너무도 명백하다면유죄판결을 선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제도는 발언권이 없는 원고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 배려이기도 한 셈인 것이다. 최종 판결은 판사가 하는 것이지만, 배심원들의 의견이 가지는 힘 역시 크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심원들은 최대한 자신의 편견에서 벗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증언과 정황들을 다시 살펴 내려진 선고가 정당한 근거를 가졌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영화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영화 초반부를 보면 배심원들은 이러한 임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남의 일 구경하러 온 양 가벼운 태도를 보인다. 증권거래, 야구 시합, 검사의 인상이 어떻다느니 하는 잡담 일색이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단 시간의 투표로 모든 것이 명료하다는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입장 정리 뒤에는 개개인의 편견이 숨어 있었다. 유죄를 주장하는 그들의 공통점은 정당한 근거가 아니라 나름의 확신’,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자기의 직관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정당하다고 판정 내릴 수 있을까?

노인은 설교하기를 좋아한다는 편견, ‘요즘 애들은 모두 폭력적이고 제멋대로며 구제불능이라는 고정관념, ‘이런 애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 뒤에 숨겨 있는 자기 개인의 상처, 법정의 증언은 절대적이라는 편견. 사람은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또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인식 틀을 가지고 소통하고 있기 마련이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객관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인식의 틀은 너무나 좁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사실이 무너진다는 것, 어떤 한 가지 불명확한 난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선택을 한다. 이쪽, 아니면 저쪽. 그러한 것들은 보통 어느 쪽으로나 해석이 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한 쪽을 택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편견이 난무하고, 개인적인 감정은 판단을 흐린다. 우리의 사고는 과거의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왜곡되고 뒤틀린다.

 


 

마지막까지 유죄를 강하게 주장하던 남자가 외친 나쁘고 매정한 놈은 사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들을 향한 것이다. 그의 안에 있던 분노와 좌절과 슬픔이 그 소년의 유죄를 의심할만한 가능성을 배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 만큼, 왜곡된 사고가 지키고 서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영화에서 배심원들이 내려야 할 판정의 임무는 표면적으로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소년의 혐의에 대한 유죄/무죄의 선고이지만 사실은 그들 개개인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한 판정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 착각의 존재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편견(Illusion). ‘잘못된 믿음’.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김경일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을 가진 후부터는, 믿음에 위배되는 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안목을 굉장히 좁힌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존 바그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직시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기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 착각의 올무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편한 방식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간다. 자기 합리화가 없다면 사람들은 최소한도의 안정도 누리기 힘들 것이다. 어느 정도의 주관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영화는 편견의 찡그려진(angry) 압력을 거부하고 다른 가능성에 손을 들며 무죄를 선고했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말했다.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착각을 자기가 하는 존재냐, 하지 않는 존재냐 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는 큰 차이를 가지고 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편견에 이끌려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편견에 갇히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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