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 6점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세계사



 제가 2009년에 접한 기독교 소설입니다. 이 작품의 대단한 점은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까지 올랐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개인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쓴 책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돌려읽혀진 것이 출간에 이르렀고, 여러 나라에 퍼뜨려지게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매켄지라는 인물이(신학을 공부한 일이 있는 일반인입니다.) 외딴 오두막으로 유괴되어 살해당한 딸아이로 인해 신앙을 잃고 회의적으로 살아가다가 '파파(아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로부터 메세지를 받고 딸이 살해당한 그 오두막으로 갑니다. 여기에서 파파와 사라유, 예수라는 세 인물(삼위일체를 풀어내고 있습니다.)과 며칠 간을 지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과정을 거치며 오두막에서의 상처까지도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목회상담의 모범 케이스;를 소설로 표현해냈다고 평가해도 적절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흔히 들어봤을짐한 '쓴뿌리'를 뽑아내는 과정이랄까요. 플롯 자체로만 보면, 개인적인 고통과 문제에 대한 이해와 답을 얻도록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차후에 다룰 예정이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실천신학의 한 분야인 목회상담학이 결코 올바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두막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고통', 혹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그 고통의 자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인터뷰에 밝힌 바와 같이 the house you build out of your own pain 이라는 것이지요.

 잠시 사족을 달자면, 고통의 문제는 많은 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고찰되어 왔습니다. 개인의 문제에서부터 자연재해, 악이라고 상정되는 그 어떠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선한 하나님과는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고통이 언제나 난제였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 C.S. Lewis 도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저서를 쓴 바 있고, 필립얀시도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Where is God when it hurt)'라는 저서를 출간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책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고통과 악을 같이 놓은 데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기가 어렵겠습니다.)

 각설하고, 문제는 이 책이 기독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에 기초한 일종의 신앙고백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통 기독교의 신학과는 충돌하는 부분들이 몇몇 신학자들에 의해 경고되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출간되는 신앙서적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문제입니다만, 특히 베스트셀러로 주목받는 저서라면 더욱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이 책은 일반서적으로 알려져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많이 읽히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심화될까 우려되기까지 합니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서 덧붙인다면, 가능하신 분들은 원서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명백한 오역이 드러나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설 내용 자체에 있어서 문맥의 어색함이라던가, 인물의 행위에 관한 이야기의 오역까지는 참아줄 만합니다만,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오역은 자칫 잘못하면 정통과는 전혀 다른, 즉 이단으로 빠지는 위험성이 생겨납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 셀러에 오른 지 오래이고, 또 여전히 선물용으로 절찬리에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적잖이 걱정이 됩니다. 신학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심화된 성경공부'수준의 공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신학은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이 신학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학문하는 이유, 치열하게 논박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의 뿌리이고 토대이며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필자가 지적하려고 하는 부분은 오두막 p.153에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서술입니다.
 원서에는 "We are not three gods, and we are not talking about one god with three attitudes, like a man who is a husband, father, and worker. I am one God and I am three persons, and each of the three is fully and entirely the one." 직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3명의 신이 아니예요, 우리는 3가지 면을 가진 하나의 신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예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회사원인 한 남자를 말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나는 하나님이고 또 나는 세 위격을 가졌지만, 이 셋은 완전히 전적으로 하나입니다." 원서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정통신학에 기반한 삼위일체론에 부합합니다. 그러니 원서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본은 다릅니다. "우리는 세 신이 아니라 세 속성을 가진 하나의 신이죠.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노동자인 한 사람처럼 말이예요. 나는 하나의 하나님이고 또한 세 인격이며 이 셋은 전적으로 하나죠." 기존 교인분들께서는 삼위일체라는 잡히지 않는 개념을 설명하는 이 부분이 이렇게 쉽고 명확하게 설명된다니! 하며 무릎을 탁 치셨을지도 모르게습니다만, 번역본과 같은 이해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양태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의 유사하나 끝이 다르면 사이비이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번역본대로 읽는다면 독자들이 무척이나 쉽게 이해하고, 읽기도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용상의 편의를 위해 잘못된 내용을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책을 접하시는 분들은 오역이 많음을, 원서라고 해도 신학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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