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 8점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신경숙은 흥행보증수표 같은 작가이다.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가는 그녀를 보면 일본의 걸출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르기도 한다. 최근작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출간 이래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올라있고, 각 대학도서관에서는 예약 대기자가 140명에 육박할 정도라고 하니, 그 인기가 가히 가공할 만하다.  원래 상하로 나뉜 것을 한 권으로 개정 출판한「깊은 슬픔」또한 많은 여성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엄마를 부탁해」도 마찬가지로 한 평론가로부터는 '작품 중에서도 확실한 성공작이지만 요즘 세상에선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인기에 비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남성독자들도 상당한데, 공통된 이유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다'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평가절하될 것은 아니고 그냥 눈물 콧물 잘 짜낸다, 정도. 여성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소설을 읽고 한동안은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는 얘기가 많은데, 그것은 그만큼 감정이입이 깊이 되고 몰입도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금껏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특히 신경숙만큼 [한국]여성의 복잡미묘한 심경을 섬세하고도 '와 닿게' 표현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것인 지.
 일단 잡으면 술술 읽어 내려가게 되는 문장력은 감탄할 만하다. 쉽게 읽힌다고 해서 이 문장들이 결코 쉽게 쉽게 쓰여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깊은 슬픔」의 개정판을 내면서 그는 '단 한 문장도 손을 대지 못했다. 어디 한 군데를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고 한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을 고르는 열정이 그 안을 채우는 다른 문장들에게는 빠지겠는가. 글을 읽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때때로 책에 쓰여진 그대로 마음에 울리는 문장들이 있다. '몸의 기억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마음보다 정직해서겠지.(외딴방, p. 403.)' 같은. (또 그는 언제나 제목 안에 이야기의 모든 것[이야기 그 자체, 감성, 의미, 작품 전체의 인상까지도]을 함축한다. 제목 역시 울림이 커서,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와 먹먹함으로 내리 누른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첫 문장을 떼고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로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잃어버렸을 뿐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놓고 싶었다.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엄마를 부탁해」-작가의 말 중' 그는 어머니와 함께 보낸 15일 간 새벽마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의 인생에 자신이 기억하는 이상의 많은 것들이 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고 한다.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로서 살아온 것이 아님을. 나와 똑같이 욕구를 가지고, 한 사람의 주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갔음을 말이다. 엄마가 아직 곁에 있다는 것,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서, 아직은 늦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음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첫 문장을 탄생시켰다고 했다. 마지막 문장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은 그런 마음을 담은 작가의 당부라고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책은 4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큰 딸, 큰 아들, 남편, 그리고 '엄마' 당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이야기는 '나'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 '그', '당신'이라는 대명사가 등장한다. 너와, 그와,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마'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너는 엄마의 이야기가 너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에필로그 장미 묵주, p. 274'
 엄마, 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너', 곧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엄마를 말해주고 있다.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부터 엄마는 가족들의 기억에서 투명해져만 갔다. 엄마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신은 이 집을 내키는 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면서도 아내가 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p. 156.)' 
 엄마를 잃고나서야, 인물들의 삶에 녹아내린 엄마의 기억들은 곳곳에서 선명해진다. '엄마의 실종은 그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 속의 일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그 문짝까지도.(p. 120.)' 그러나, 엄마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엄마는 결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주변에 머물러 있다. 엄마를 잃은 데에 대한 자각은, 곧바로 엄마를 잊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한다. '-엄마를 모르겠어.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밖에는.(p. 209)'
 엄마를 모르겠어. 문장은 나의 말이 된다. 나는 엄마를 알고 있나. '엄마도 네가 오빠들에게 갖는 감정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인간이란 깨달음은 곧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로 전환되었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간혹 너는 실제로는 1936년에 태어났으나 호적에는 1938년으로 기록된 엄마의 유년을, 소녀시절을, 처녀시절을, 신혼이었을 때를, 너를 낳았을 때를 생각해보곤 했다.(p. 37)' 「엄마를 부탁해」는 우리가 여태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마저도 결국은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니 엄마의 의미는 한 없이 크건만, 정작 엄마를 모른다. 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엄마를. 엄마의 이름이 '엄마'가 아님을. 
 엄마는 결코 우리를 고발하지 않는다. 질책하거나 책망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장에서 엄마는 모두에게 담담히 작별을 고한다. '나를 가엾이 여기지 마. 네 가슴속에서 오래 살았잖아.(외딴방, p. 404.)' 말하는 듯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9개월 째. 엄마를 찾지 못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아직 엄마를 찾기에 늦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우리 모두에게, 엄마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당부한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책을 읽으며,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생각했다. 내가 읽은 것은 엄마의 말뚝 첫 편인데 이 이야기는 (성)문 안에 말뚝을 박기까지(집을 마련함, 삶의 터전을 세운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억척스러움과 강한 생활 의지로 남은 우리시대 모든 어머니를 향한 고백과도 같은 소설.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엄마라는 주제는 늘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지만, 식상하게 만들지 않기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의 언어는 낯설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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