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맨 워킹
감독 팀 로빈스 (1995 / 미국)
출연 수잔 서랜든,숀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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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스치듯 본 기억이 있다. Start 버튼에 불이 들어오면 엄청난 크기의 주사기에 가득한 6개의 주사액을 혈관 속에 밀어 넣고, Finish에 불이 켜지는 것으로 사형집행이 끝났음을 알렸다. 사형 집행장에는 사형수의 죄 값을 받았음에도 뭔가 모를 찝찝함으로 침묵하는 피해자들이 남아있다. 단지 마지막 장면만을 봤을 뿐이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방관한 채 바라보는 피해자들은, 또 다른 살인자 같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영화는 ‘사형제도’라는 것을 정면에 던져놓고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놓음으로써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사람을 죽여 놓고도 스스로는 살고 싶어 하는 살인범들을 경멸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고.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살인제도에 반대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죽인 죄로 누군가가 살인범을 죽이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살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살인범의 평생 독방에 가둬두고 ‘너는 살인자다’하는 녹음된 테이프를 끊임없이 틀어주는 ‘정신적 고문’이 더 괴롭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이기도 하지만.)

 영화만을 두고 먼저 얘기하려고 한다. 몇몇 장면 구성에서, 나는 주인공들이 다소 위압적이고 강제적인 어떤 사회의 모순 된 구조에 의해 눌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녀와 피해남성의 아버지가 대화하는 구도에서 특히 그랬다. 수녀가 처음 남자를 찾아갔을 때, 수녀에 비해 월등하게 키가 큰 남자는 수녀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본다. 다소 위압적으로. 집 안에 들어가 소파에 앉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낮은 데다 소파에 푹 파묻혀 왜소해 보이는 수녀에 비해 딱딱하고 다소 높은 나무의자에 앉은 남자는 체격이 커서 그런지 위협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남자는 끊임없이 수녀를 닦달한다. “어떻게 그런 극악무도한 살인범의 편에 설 수 있는 겁니까?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는 편안해도 된다는 겁니까?” 하고. 수녀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에서 쫓겨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장면은 상당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쪽이 옳다고, 저쪽이 옳다고 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약자를 피해자 가족이 아니라 수녀와 사형수로 설정해놓고 있다.

종교적인 성향을 띤 이 작품에서 유독 주목했던 부분은, 영화 중반부의 부활절 장면이었다. 사형집행일이 결정 된 반면, 부활절을 축하하며 “Happy Easter”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얼마나 모순되어 보였는지 모른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다시 살아남을 통해 그를 믿는 자 역시 새 생명을 얻음을 축하하는 날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져본다.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고 단죄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생명은 허락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하면 한 생명에게 ‘죽어야 한다’고 단정 지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 않을까. 감독이 ‘부활절’을 집고 넘어간 것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만 같다.







헬렌 수녀는 “사형의 99%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형을 앞두고 사형집행소의 신부가 수녀와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눈여겨보았다. 말하고 있는 신부의 입이 클로즈 업 되고 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세상이 내세우는 권위의, 이겨낼 수 없이 무거운 압력을 내뱉고 있었다. 사형까지의 집행과정에서 끊임없이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고 News가 떠들썩한 것 역시도, 이 사회의 문제를 끊임없이 부각시키는 감독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와 사형수의 마지막 대화에서, 사형수 매튜는 살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죽음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을 한다. 영화 내내 매튜는 뭔가 생각 없고, 뻔뻔하고 불량스러운 기질이 다분해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인상을 주었는데, 후반부에 들어서서는 애처로울 정도로 진실하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판장에서도, 인터뷰에서도 한없이 삐뚤어진 모습으로 일관하던 그가 수녀와의 대화에서 무너지듯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에서는 “아, 저 사람에게도...”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비약도 과장도 없었다.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더욱 불편했다. 그것은 사형수에 대한 감정에서 드러난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죽음을 앞둔 그에 대해 애처로움을 느끼지만, 나아가 사형제도에 대한 불합리성을 느끼기도 하지만 완전히 그의 편이 되어서 ‘저사람 뉘우쳤으니 석방시켜도 될 것 같은데’ 하지는 않았으리라. ‘죄 값은 치러야 하지만 살인은 뭔가 아닌 것 같아’ 라는 인상만을 깊이 받았으면 모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영화 내내 읽어낸 메시지는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두 가지 살인을 보여준다. 매튜가 행한 우발적 살인, 사회가 행한 매튜에 대한 살인. ‘어느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다 평등한 권위를 가져야 한다. 개인이 행하든 사회가 행하든 한명의 인간을 죽이는 것은 명백한 살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형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형집행인과 사형수, 피해자와 수녀일행이 사형집행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사형을 방관하고 있는 관객(사회구성원들)이 있다. 사형집행인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고, 사형수는 정치적 의도와 사회와 피해자들에 의해 죽어가고,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원수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르는 기분을 떨칠 수 없으리라. 사형수가 죽어버린 것 이 외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죄는 복수에서가 아니라 용서에 의해서 소멸된다. 죽기 직전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유언을 남긴 매튜와,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피해자 아들의 아버지의 모습은 사형집행을 더욱 더 모순으로 몰고 간다.

매튜는 죽었다. 그가 죽인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픔은 그대로 남고, 복수는 위안이 아닌 불편함을 남겼다.

사형제도는 이대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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